만이 형님의 비망록

6월9일: 참새와 방앗간

고사황 2023. 6. 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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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코로나로 인한 사업실패 후 좌절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친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사실 그 이전부터 조금 전의 일을 깜빡깜빡하는 등 전조증상을 보였으나 나이 탓으로 돌리며 가족들 모두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다들 각자의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갑자기 섬망증세가 나타난 엄마는 가족들 손에 이끌려 대형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정신과에서 2-3일 정도 입원을 하면서 받은 검사결과는 초기 인지장애. 소위 말하는 치매였다

퇴원을 한 후, 엄마는 모든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엌일까지 모든 일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족들 중 누군가는 모친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고행의 시작이었다.

누나는 약국일로 바빴고 지근거리에서 엄마를 케어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실업자로 할 일이 없었던 내가 시봉을 하게 되었다.

한 1년 정도 엄마의 아파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청소와 빨래, 식사를 챙겨드렸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의 치매증세는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이제는 노인성 우울증까지 겹쳐 상태가 안 좋으면 의심병이 도지고 주변사람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1년도 안 돼 조금씩 나는 지쳐가기 시작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결국 아내가 먼저 합가를 제안했고 누나도 동의하여 두 집 살림을 하나로 합쳐 신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 온 위례 신도시는 모친이 살던 강남 중심가나 우리가 거주하던 신도시 보다 훨씬 더 썰렁했다

아직 입주가 덜되 매일 이삿짐 차가 들락날락거렸고 주변 상권도 아직 형성이 안 돼 장을 보기 위해서는 근처 대형마트에 차를 몰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새로운 환경은 치매를 겪고 있는 엄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혹자는 산 아래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면 병의 차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으나 우울증까지 겹친 엄마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편식이 심해 가리는 음식이 많았다.

옆에서 삼시세끼 음식을 조리해서 대접해야 하는 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인간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다 해결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엄마를 모신지 3년 여가 돼 가자, 엄마와 나 둘 다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면도 있었다.

엄마는 쉬는 날 아내와 드라이브를 가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외출을 거부하였고 일주일에 두 번 오는 요양사가 아무리 꼬드겨도 절대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지금도 엄마는 하루종일 그저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애꿎은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이젠 나도 애써 엄마를 깨우지 않는다.

대충 잠에 지쳐 엄마가 일어나는 시간은 11시경이고 시간상 아침은 건너뛴다.

점심은 아무리 이것저것 만들어 드려도 몇 입 드시지 않고 수저를 내려 놓는다.

그저 달달한 과자 나 과일 몇 개를 먹을 뿐이다.

그렇게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나면 저녁은 5시경에 좀 일찍 차리게 된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배가 고프니 일찍 드려야 하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저녁은 좋아하는 반찬과 함께 밥 한 공기는 다 드시기 때문이다.

이런 하루 일과가 매일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낯선 생활과 우울증이 겹쳐 꽤 힘든 시기를 보냈다.

지금도 암울한 기분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3년 정도 되다 보니 나의 생활에도 좀 루틴이 생겨나는 것 같다. 날아가던 참새가 가던 길을 멈추고 방앗간에 들어가는 것처럼...

 
일단 6시 30정도에 일어나 전기자전거를 타고 후문 만랩 커피숍에를 간다

만랩 사장님은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사장님인데 화려한 싱글이다.

혼자 살아서 그런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가게로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동네 가게 중, 바로 옆 빠리바게트 다음으로 일찍 가게문을 연다.

운이 좋으면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가락동 협진모터스 팀장님을 만나, 같이 커피를 먹으면서 수다를 좀 떤다. 주로 아파트 아줌마들의 기괴한, 사이코적인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주요 소재다.

매일 그 팀장을 만나지는 못하므로 대개는 커피를 다 마실 동안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소재는 다양하다. 가게에 오는 아줌마들 이야기, 동네 가게들 근황, 새로생긴 버스노선등등 아무튼 이야기의 소재는 끊이지 않는다.
8시쯤 채소/과일가게가 문을 열면 엄마가 먹을 과일이나 필요한 채소를 사서 집에 온다. 엄마 약을 챙겨 드리고 1시경에 차려드릴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면 스타필드 옆, 데일리 반찬가게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먹을만한 반찬 몇 가지를 사서 온다.

요즘은 간식이나 과일, 과자로 점심을 때우는 경우가 많다. 점점 입맛이 없어지고 계신다.
 
엄마가 점심이나 간식을 먹고 나서 2시쯤 설거지를 다 마치고 나면 다시 집을 나와 전기자전거를 타고 동네 유랑에 나선다. 

처음 들리는 곳은 몇달 전 정문쪽에 메가 커피가 신규 오픈한 메가 커피다.

인천 사는 52살의 남자 사장님이다.  역시 싱글이다.

새벽에 인천에서 출발해서인지 7시정도에 가게에 도착해서 7시 30분부터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울 동네에서 세번째로 빨리 문을 여는 가게가 됐다.

요즘 의사의 충고에 따라 커피는 하루에 두잔 정도 마시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스 티를 주문해 사장님과 수다를 떤다.

만랩사장님도 메가 사장님도 장사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열심히 해보려는 각오가 눈에 띈다.

가끔 3시쯤 손님이 없을 때 메가사장님은 알바와 배드민턴도 치고 외발 전동자전거도 타고 흥미있는 취미 생활을 한다.

그 다음에는  마천동 버스 종점의 빈 스토리 커피숍으로 간다.

얼마 전 주연이와 약속 때문에 들렀던 곳인데, 여기 주인아줌마가 필리핀 사람이다. 첨엔 이국적인 외모지만 한국말을 워낙 잘해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지만 같은 나라 친구와 그 나라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눈치를 챘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그냥 그때 친구와 하던 말을 듣고 분석한, 나의 추측이다.

오전에 만랩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오후에는 메가에서 아이스 티를 그리고 여기 와서 두번째 커피를 먹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집 맞은편, 맛집으로 유명한 꽈배기 집에서 꽈배기 2개를 사가지고 온다. 엄마가 그런대로 잘 먹기 때문이다. 남으면 나도 먹고....

화요일 목요일에는 용달차에 꽃다발을 잔뜩 싣고 버스 종점에 꽃차 아저씨가 온다.

한다발에 모두 5천원.....

가끔 예쁜 꽃이 있으면 사와서 화병에 꽂아 두고 며칠을 감상한다.

저번에는 작약을 사왔다.
 
마천동 빈스토리에 앉아 창밖을 보면 오고 가는 등산객들이 꽤 많다. 주로 나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더 오래된 분들이다. 등산 오는 젊은이들은 주말에도 거의 본 적이 없다. 모두가 중장년층이다. 여기 앉아 사람구경 하는 것도 꽤나 재밌는 하루일과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와 비슷하게 저들도 하루의 무료한 일과를 보내느라 등산도 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발버둥 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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