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반려동물이 키우고 싶어졌다.
특별히 하는 일없이 모친시봉, 음악감상, 산책, 인터넷 검색등으로 소일하다 보니 일상이 무료 해지기 시작했고 거기다 우울증과 불안증세까지 더해지니 가끔 옆구리가 허전해짐을 자주 느끼곤 한다.
맘에 맞는 사람이 곁에 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나의 영원한 베프 현진 양은 일상이 매우 바쁘고 치매노인은 말이 없다. 딸과는 그녀의 정신적, 정서적 코드를 맞출 재주가 내겐 없고... 답답한 일상의 연속이다.
그나마 아내의 권유로 하루에 한 가지 엄마를 위한 반찬을 만들어 보면서 소소한 보람을 느끼고 아파트 후문의 만랩 커피숍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여사장님과의 대화 속에서 아직 인생의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식당 주인장 모양 주야장천 요리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장사가 바쁜 사장님을 붙들고 하루종일 곁에 앉아 수다를 떨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일상의 허전함과 고적함을 느끼던 때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나를 경북 봉화 산골짜기 마을에서 부모님을 도와 과수원을 하는 어느 견실한 총각의 채널로 안내해 주었다. 시골에서의 잔잔한 일상 속 어느 날, 총각네 과수원 창고로 하얀색 시고르 자브 종 수컷 새끼 한 마리가 아장아장 찾아오면서 그의 유튜브 채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채널 이름 하여 "누기시골".
산속에서 어미를 잃고 총각네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산돌이'
기특한 일을 했을 때 불러주는 존칭은 "산돌군"이다.
그 산돌이가 시골집으로 오면서 총각과 연로하신 부모님 셋만 살던, 평화롭지만 조용했던 가정은 강아지의 재롱과 돌발행동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활기찬 집으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업로드되는 영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개는 마당에서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총각의 아버지는 부모 잃은 산돌이 가 애처롭다고 집 안에서 키우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스위트함이 샘물처럼 넘치는 어머님은 혹여 어린 개가 탈이 날까 모든 먹이를 하나하나 잘라서 입에 넣어주시는 정성을 보이셨다.
그렇게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성견으로 성장한 기록을 담은 그 누기채널이 벌써 4년째이다.
산돌이에게 쏟는 가식 없는 사랑과 애정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구독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어느덧 12만 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젠 애견인들 사이에선 나름 유명채널이 되어 가을 사과 수확철에는 전국에서 주문이 폭주한다고 한다.
물론 장사 속으로 강아지를 키우고 유튜브를 시작하지는 않았으리라. 무료한 시골 생활 속에서 활력을 얻고 아가들의 성장과정을 비디오로 녹화하듯이 산돌군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선한 의도와 행동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선행이 선업을 낳고 경사스러운 일을 만들고 본인과 가정에 행운과 행복이 충만해진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때우기용으로 그 누기시골 유튜브를 보던 어느 날, 문득 "나도 반려동물을 한 마리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처럼 말을 못 하는 동물이지만 함께 동고동락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공유하며 살아가기에 반려동물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길 잃은 산골 강아지 한 마리가 적적하던 시골 가정에 즐거움과 활력을 가져다주었듯이 나도 정을 주고받는 존재가 있다면 지금의 내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보통 10년 이상 키울 각오를 해야 하고 병원비, 미용비, 간식비 등 비용도 적지 않게 든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섣부른 판단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입양을 했을 때 벌어질 문제들도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고...
가장 먼저 맘에 걸리는 긴 엄마다.
엄마는 선천적으로 개든 고양이든 동물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우 꺼려한다. 심지어 동물 키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기까지 한다. 그중에서도 고양잇과 동물들의 눈이 너무 무섭다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행여 나의 이기심으로 동물을 키웠다가 병세가 더 악화될 수도 있고...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 환자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상태가 좋아지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고 환경만 허락된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고는 하셨다.
그다음으로 걱정되는 점은 딸인 주리 양과 관련이 있다.
만약 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개보다는 고양이(브리티쉬 숏헤어, 수컷, 블루그레이 종)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우리 딸이 광적으로 고양이를 좋아한다. 거의 덕후 수준이다. 고양이 외에 개도 좋아하고 다른 동물들도 두루두루 좋아하지만 그중 냥이를 특히나 좋아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우리 딸은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타인과 교감 능력이 상당히 부족하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능력은 아예 없다고 볼 수 있고,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처리하려 한다. 극단적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성격은 사회생활이나 애완동물을 기를 때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거라는 게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주리가 초등학교 1-2 학년 즈음에 햄스터를 기른 적이 있었다. 톱밥도 깔아주고 해바라기씨 모이도 주면서 오로지 주리 혼자서 전담 사육을 했었다. 그런데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스트레스(?)로 죽어버렸던 적이 있다. 순전히 내 관찰의 결과로 판단하건대 사인은 햄스터에 대한 주리 양의 과도한 집착으로 생긴 심장마비로 여겨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햄스터 케이지에서 햄스터 한 마리를 꺼내 한 손에 꽈악 쥐고 머라고 말을 걸었다. 어느 날엔 협박성 말투, 어느 날은 달래는 말투... 아무튼 사랑스러운 어투는 절대 아니었다. 당시엔 아이가 학교에서 당한 스트레스를 저런 식으로 푸는 게 아닐까? 하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렸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성장한 다음에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먼가 가 잘못된 가고 있었던 거 같다.
이런 경험과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성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냥이를 데려왔을 때의 주리반응과 사육할 때 어떤 이상한 행동을 보일지 예측이 곤란하다. 고양이도 고양이 나름이라 특이한 성격을 가진 아이도 있을 수 있고, 그냥 바라만 봐주기를 좋아하는 애도 있을 텐데 주리는 아마도 자기의 주관대로 냥이를 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데려온 고양이가 예전의 햄스터 꼴이 날 수도 있다.
상기한 이유들로 인해 지금은 일단 반려동물 입양, 정확히는 고양이 입양은 보류를 한 상태다. 좀 더 심사숙고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개가 아니라 왜 고양이냐고 물어본다면, 동물을 키우는 현재 우리나라의 환경과 지금 나의 상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시골의 논밭이나 농장등을 지키는 실용적 목적의 견공들을 제외하곤 애완동물로서 개를 키우는 가정은 대부분 도시, 그 안에서도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분들이 절대다수일 것이다. 미국처럼 푸른 잔디밭에 넓은 뒷마당이 있는 환경이라면 나도 레트리버나 레브라도를 키우고 싶다. 견공에게 스트레스 프리한 널찍한 공간을 제공해 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동주택의 공간은 인간끼리 살기에도 너무나 제한적이다. 인간과 개 서로에게 불행할 거 같다.
반면 고양이는 성격상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고 고독을 즐기는 종자 같다. 나와 비슷하다. 목욕을 시켜줄 필요도 없고 스스로 털도 깨끗이 유지한다고 한다. 개들처럼 자기와 놀아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집에 혼자 있어도 크게 스트레스도 받아하지 않는다. 반려동물로서 나와 궁합이 잘 맞는다.
결론적으로 난 개도 좋아하고 냥이도 좋아한다. 하지만 양육 환경과 내 성격, 우울증을 겪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고양이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 제가 올리는 글은 원래 타이프라이터로 쳤던 글들을 텍스트로 변환해서 올리는 겁니다.
레트로 감성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원본파일을 열어보셔요.
'만이 형님의 비망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25일: 신언서판(身言書判) (0) | 2023.05.26 |
---|---|
5월25일: 타인의 마음 (0) | 2023.05.25 |
5월24일: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0) | 2023.05.25 |
5월24일: 타이프라이터 (0) | 2023.05.25 |
5월24일: 셋푸쿠 (切腹) (0) | 202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