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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형님의 비망록

6월12일: Gratitude

고사황 2023. 6. 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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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감사함. 고마운 감정등으로 표현되는 말이다. 한자로는 보은(報恩)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은혜를 갚는다고 하면 뭔가 상대가 나에게 베푼 은혜와 동등한 가치이거나 그 이상의 것을 되돌려 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드는 단어이기도 하다. 원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물질만능주의가 되면서 그 의미도 퇴색한 것이리라.
 
미국에 1년 반을 머무르는 동안 몇 가지, 미국 사회에서 감동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감사의 표현이 아주 일반화돼 있다는 거였다. 뒷사람을 위해 출입문을 잠시 잡아주는 사소한 친절에도 진심 어린 표정으로(비록 그것이 그들의 의도적인 가식 또는 격식 일지라도) Thank you so much!  My Pleasure!라는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보고 비록 총기사고가 난무하곤 있지만 미국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혼자 멀 끙끙거리는 사람을 보면 꼭 차를 세우고 내가 뭐 도와줄 것 없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아무튼 사소한 것에서 친절을 베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사회였다. 요즘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면서 서로 간에 딱딱한 표현을 하는 전통적인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본다. 좋은 현상이다.
 
나와 우리 부모 세대는 워낙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라 그런지 이런 감사의 표현이나 행동에 아주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유교식 서당교육을 어렸을 때 받은 부친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겉으로의 표현이 아주 거칠었다. 아빠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비단 우리 가족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생이 잘 안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어릴 때 자라온 환경, 즉 가난하지만 똑똑한 청년이 그런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강하게 버텨야 했으므로 점차 독하고 아집에 가득 찬 성격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럼 나의 모친은?
예전 글에서 아빠에 대해서는 미움과 원망을, 엄마에 대해서는 한없는 모정의 표본인 듯 묘사를 했지만 사실 엄마도 성격 자체는 그리 본받을만하지는 않다. 단지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을 저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 우리를 잘 먹여 살리려고 했던 그런 책임감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지 엄마도 여러모로 단점이 많은 분이다. 이런 생각을 난 벌써 국민학교 다닐 때쯤  했으니 조숙했다고 해야 하나? 더운 여름날 버스비 할 돈으로 홀라당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국민학생을 생각해 보면 된다.  주로 했던 생각은 "아빠는 왜 집에서 놀까?" "아빠는 왜 친절하지 않을까?" "엄마는 좀 이상해. 이기적이야"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등등 주로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과 가족들의 내면의 모습들을 사유했던 것 같다. 물론 매번 그렇지는 않았다. 난 임마누엘 칸트가 아니었으므로 지나가다 신간 잡지나 만화책에도 눈이 갔고 새롭게 전시된 프라모델을 보면서 침을 꼴딱이던 시간이 사실 더 많았다.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엄마는 아빠의 무능함 때문에 평생 경제적으로 고생이 많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주리 양이 만 1살이 될 때까지 친구와 함께 약을 팔았으니 그 세월을 충분히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보상심리가 너무 크다. 또한 친구들이 우리보다는 훨씬 여유 있게 살았으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병도 아주 심각했다.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서 그런지 아님 원래 성격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 사전에 양보, 배려란 단어는 없다. 엄마가 누구에게 양보나 배려를 한다는 건 예전에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보은의 차원이지 무조건적인 적선은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종교하고는 궁합이 잘 안 맞는다. 나에게 해준 것이 한 개도 없는 보이지 않는 신 따위에게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말년에 부친  살아생전에 두 분이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겉으로는 아빠가 오늘내일 하니 죽어서 천국에라도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으나, 기실은 장례식장에서 빈소가 너무 썰렁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빠 빈소에 와서 자리를 가득 채워주고 시끌벅적한 자리를  만들어준 이들은 성당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직장선후배, 동료들, 학교친구들이었다.
또 하고 많은 종교 중에 가톨릭을 선택한 이유가 좀 웃긴데  돈 내라는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이 가장 컸다.  불교도 돈내란 이야기 안 한다고 하면 절은 좀 없어 보인다고 싫다고 했었다. 아무튼 무늬는 가톨릭인데 지금까지도 성경도 안 보고 찬송가도 모른다. 그냥 우상숭배하듯  성모마리아 상과 십자가만 전시하듯 모셔두고 있다.

성당도 다니고 나이도 들고 하면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온 인생도 반추하면서 없는 배려심도 생길 만 하지만 천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 생각 안 하고 말실수를 하는 건데 본인은 그게 잘못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엄마가 아프기 전에 누나네와 우리 식구가 다 같이 외식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학벌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양대공대가 자기 때는 아무나 갈 수 있는 아주 후진 대학교였다는 이야기를 그 식당홀에서 아주 큰소리로 하는 거였다. 다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그 자리에 한양대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언짢았겠는가? 게다가 매형은 성균관대학을 나왔다. 매형 때문에 표현은 안 하지만 아마도 엄마 마음속에는 성대나 한양대나 다 똑같은 학교 서열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배려와 양보가 없는 성격과 더불어 이기적 마인드는 엄마가  젊었을 때는 더 심해서 한때 난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당시(1991년) 직원대출로 7000만 원을 거의 1퍼센트의 이율에 30년 상환조건으로 빌려주었고 개포동 주공아파트 시세가 1억 원이었으니 바짝 3년 정도 모아서 독립하고 혼자 살아보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었다. 그 계획대로 실천을 했으면 지금 내 인생도 달라졌겠지만, 세상만사 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도 않거니와 운명이었는지 전처를 만나 애들을 가지게 되면서 내 인생은 서서히 꼬여간 것 같다.
아무튼 엄마의 저런 성격을 맞춰주고 살아야 할 여자를 생각했을 때, 괜히 미래의 아내될 사람에게 미안함이 컸으므로 독신주의를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결론적으로 전처와 아내는 그리 썩 좋은 고부 관계는 아니었다. 전처도 워낙 어린 나이에 결혼이란 걸 해서 잘 모르는 것도 많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이런저런 불만들이 쌓여만 갔다. 가뜩이나 배려심과 양보심이 없는 데다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극에 달해있는데 아무리 아들 낳은 며느리라고해도 성에 찼겠는가?

나이가 들고 치매가 와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장을 보고 유투브를 참고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 한들 당신이 자기 남편 시봉할 때처럼만 하겠는가? 엄마는 철이 들려면 멀었다. 나이가 100살이 먹어도 철이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다.
자신을 대하는 상대방의 진심과 노력, 그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지 못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외톨이가 된 채로 불행할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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